강원도 홍천군 화촌면에 있는 청동기시대 북방식과 기반식의 고인돌군. 지석묘군. 시도기념물.
1986년 5월 23일에 강원도 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다. 1987년에 한림대학교가 정밀현장조사를 실시하여 보고문을 발표하였고, 다시 1996년도에 강원도 시군별 문화유적조사과정에서 재차 보고문이 발표되었다. 이 곳에는 고인돌[支石墓] 1기가 있고 이 고인돌로부터 군업천(君業川)을 따라 남쪽으로 약 250m 거리의 군업2리 608-1번지에 15기로 추산되는 고인돌군이 입지한다.
단독 1기의 뚜껑돌[上石]은 동서 장축이고 편평하며 반은 지하에 잠겨 있다. 크기는 175×310×25㎝ 정도이고 석재는 화강암이다. 하부구조(下部構造)를 알 수 없으나 도괴된 탁자식(卓子式)으로 추정되며 뚜껑돌의 윗면 남편에 붙어서 35개의 홈구멍[性穴]이 파여 있다. 그 중 큰 것은 지름이 10㎝, 깊이가 7㎝이고 제일 작은 것은 지름이 4㎝, 깊이가 2∼3㎝이다. 뚜껑돌은 원래 남북의 길이가 지금보다 60㎝ 더 길었을 것으로 보이나 남쪽부분이 절단되었다. 주민들은 이 고인돌을 장군바위라고 부른다.
주민들 말에 의하면 최근 군부대에서 석재로 쓰기 위하여 깨내거나 이동시킨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있고, 고인돌군 가운데에 민묘가 2기가 조성되어있다. 원래의 구조가 파괴되어 일부분만을 남기고 있는 것들이 많아서 정확한 숫자의 추산이 어렵다. 그 중에서 비교적 형태와 규모의 확인이 가능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발굴보고서 상에서 〈사례1 〉은 뚜껑돌은 정방형에 가까운 부정형의 자연괴석으로 강변에서 이동해온 것으로 보인다. 뚜껑돌 하부에는 깬돌[割石]과 강돌[川石]이 들어차 있다. 이러한 적석(積石) 사이에 30×50㎝ 크기의 고임돌[支石]로 보이는 괴석(塊石)이 노출되어 있는데 바둑판식[碁盤式]에 가깝다. 〈사례2 〉는 뚜껑돌이 편평한 깬돌로 현재 3조각으로 남아있다. 깨어진 틈 사이에 작은 강돌이 널려 있다. 동서 장축방향으로 동서 200㎝, 남북 210㎝이다. 〈사례3 〉은 뚜껑돌 크기가 400×500×55㎝인데 4조각이 난후 현재는 2조각만 남아있다. 동편에 장벽석 2개가 노출되어 보이는데 장벽석의 두께가 35㎝이다. 탁자식 고인돌로서 출토된 유물은 없다. 뚜껑돌에는 정(釘)으로 내리친 자국이 남아있으며 이 군집 안에서 가장 큰 사례이다. 〈사례4 〉는 뚜껑돌이 육각형이고 크기는 210×190×80㎝이다. 뚜껑돌 표면에 2군의 정 흔적이 남아있다. 〈사례5 〉는 대형의 탁자식 고인돌의 장벽석 만이 남아있는데 그 옆에도 다른 대형의 장벽석이 쓰러져있으나 두 개는 다른 고인돌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는 뚜껑돌 또는 벽석 일부 등이 남아있는 양상이다.
단독 고인돌과 고인돌군 모두 군업천변에 자리잡고 있으며, 고인돌로부터 북동쪽 30m거리에 군업천이 흐르고 사이는 논으로 되어있다. 군업천의 반대방향으로는 약 100m 거리까지 경작지가 이어진 후 가파른 산경사면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주변지형은 기다란 협곡안의 비교적 넓게 형성된 평지에 해당하고, 이러한 지형은 소규모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 정착농경집단의 터전으로 적합하다. 따라서 청동기시대 주민들이 홍천강류를 따라서 확산하는 과정에서 그 지류인 군업천에 접어들어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 주변에서 민무늬토기 집자리[住居址]가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군업천변의 협곡 사이의 어느 지점에는 소규모의 집자리 유적이 존재할 것이다. 강원도에서 민무늬토기를 사용하고 고인돌을 쌓은 사람들이 강의 본류뿐만 아니라 작은 지류변까지도 정착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천군업리지석묘군 [洪川君業里支石墓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출처 문화재청